구례읍 마을유래
연혁
현내면(縣內面) 동내, 서내, 남내, 북내, 북외, 백련, 주암, 회동, 사동, 시동, 아양 등 11개 마을을 관할하였는데, 계사면(界寺面)의 독자, 유곡, 변기, 논곡, 본황, 봉서, 교촌, 산정, 신촌, 월암, 원천, 점촌, 내방 등 13개 마을과 광의면 천변리(川邊里) 일부와 곡성군 고달면 탑선동 일부를 편입하여 1914년 4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으로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례면으로 고쳐서 봉동, 봉서, 봉북, 봉남, 원방, 신월, 계산, 논곡 등 10개 리로 개편하였고 1963년 1월 1일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위치
북쪽으로는 용방면, 서쪽으로는 계산리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곡성군 죽곡면 하한리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구례군의 중앙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서시천을 사이에 두고 마산면과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문척면 서남쪽으로는 순천시 황전면 선변리, 비촌리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구례읍은 구례군의 교통·문화·교육·행정의 중심지이며, 구례읍 소재지는 봉동리에 있다.
구례읍 마을
산성리
사동(寺洞)마을
1685년(조선 숙종 11년)경에 금녕 김씨(金寧金氏)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초에는 도롱골(도롱곡(道弄谷)이라고 칭하였으나 신라 말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백련사(白蓮寺)를 창건하여 고려 말기에 폐사(廢寺)된 후 조선시대에 마을이 이뤄지면서 “절골”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처음에 현내면(縣內面) 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이 된 후 산성리(山城里) 사동(寺洞)으로 개편되었다.
시동(枾洞)마을
1686년(조선 숙종 12년)경에 경남 하동에서 김해 김씨 형제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감골-감난골-감남골-감나무골이라는 변화과정을 거쳤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시동(枾 감시, 洞 마을동)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현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
아양(兒養)마을
1786년(조선 정조 10년)경에 산성봉 동쪽 산자락에 달성 서씨와 양씨 2~3가구가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현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성리 아양으로 개칭하여 구례면(읍)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련리
백련(白蓮)마을
구례읍의 발상지로 약 1,500여 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기록상으로는 990년(고려 성종 9년) 밀양 손씨(密陽孫氏)가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약 1,000여 년 전 백련사(白蓮寺)가 있었던 아래 마을로 마을 상단에 연꽃같은 동산이 있었고 처음에는 백련골, 백련동, 백련이라 불리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례읍 “백련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북리
봉북(鳳北)마을
990년(고려 성종 9년) 봉성군(鳳城君)으로 봉해진 손순흥(孫順興)이 조부 손정택(孫正澤)과 사별 후에 백련꽃이 많이 핀 곳을 택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현내면(縣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북외마을과 방광면 천변마을 일부를 합병하여 봉성산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봉북리”라 개칭하였고 구례읍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동리
봉동(鳳東)마을
봉성산의 동쪽에 위치하여 봉동리라 불리우며, 처음에는 구례군 현내면 지역으로 동내동(東內洞) 남내동(南內洞) 서내동(西內洞) 북내동(北內洞)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4개 동을 2개 동으로 병합하여 동내동의 3분의 1 구역과 북내동 전 지역을 병합하여 봉성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봉동리(鳳東里)라 개칭하여 구례면(읍)에 편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남리
봉남(鳳南)마을
구한말에 현내면 서내리라 하다가 1913년(대정 2년)에 현내면 남내리로 개칭하였으며 그 후 현내면 남동(南洞)으로 다시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내리, 남내리, 동내동을 병합하고 봉성산의 남쪽에 있다하여 봉남리(鳳南里)라 개칭한 후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
봉서리
봉서(鳳棲)마을
1738년경 남원에서 입주한 진주 형씨와 진주 강씨가 “샘골”에 정착하였고 1820년경에 경남 남해에서 입주한 김해 김씨가 “산수동”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구례군 계사면이었는데 마을 뒷산에 봉란(鳳卵)과 같은 암석이 3개 있고 그 아래에 샘이 있어서 “샘골”이라고 이름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샘골, 산수동, 향교촌을 병합하여 봉성산(鳳城山) 서쪽이 되므로 봉서리 봉서마을로 개칭하여 구례면(읍)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산수동(山水洞)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초로 이 씨, 방 씨, 최 씨가 살았고 1820년경에 경남 남해에서 입주한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산수동에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최초에는 인기동(仁基洞)에서 구인동(九人洞)으로 부르다가 1897년에 산수동(山水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산정(山亭) 마을
1516년(조선 중종 11년)경 이 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마을 지형이 배가 항구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고 있는 형태이면 봉성산의 혈맥지가 산호산이 되고 뒷산의 뿌리가 내린 터라 하여 명당터라 전해지고 있다. 봉성산의 '산(山)'자와 마을 가운데 있는 정자의 '정(亭)'자를 따서 "산정(山亭)"이라고 했으며 원래 계사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
동산(東山)마을
1680년경 산정 마을에 살았던 해주 정씨(海州鄭氏) 다섯 호가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주하여 마을이 차츰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해주 정씨가 근 100여 년간 살았으며 봉성산(鳳城山)의 봉(鳳)은 오동나무에서 산다는 설에 따라 동산마을의 서남쪽 1km 지점에 오동암(梧桐庵)이 있었고 이름도 오동평이라 하여 처음에는 동산(桐山)이라 칭하였는데 현재는 동쪽을 바라보는 산마을이라하여 동산(東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행정구역상 구례군 계사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
오봉(梧鳳)마을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초로 밀양 박씨 형제가 곰터에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 후 곰터가 폐촌되어 동산 마을에 속해 있다가 1944년 2월에 분동(分洞)되어 있으며 곰터, 까막정, 강촌, 수랍소, 금강 등 5개의 산재된 작은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 위 오동암(梧桐庵)이란 골짜기에 암자가 있었는데 암자 앞에 큰 오동나무가 있었다. 봉황새가 오동나무에 살면서, 구례읍 봉성산에 있는 열매를 따먹고 놀다가 저녁이 되면 오동나무에 와서 밤을 지냈다는 설이 있어 오봉(梧鳳)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당초에는 계사면이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
양정마을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양정들의 고라니대밭이라고 부리는 곳을 개간하여, 배 과수원을 만들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해방이 되고 일본인이 물러가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어 물가에 있다고 해서 양정마을이라 칭하였다. 양정들의 토질이 과채류 재배에 유리한 사토질이어서 무우, 배추, 당근, 참외, 수박 등 채소와 단감을 많이 재배하며, 한우를 사육하는 농가도 많다.
원방리
원천(元川)마을
기록이 없어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의 들이름이 원내골이란 들과 원들(원더리)이라는 지명으로 봐서 마을 이름을 아마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원(元川)으로 된 것 같다. 이 마을은 원천 마을과 까막정 마을을 합하여 형성되었다.
병방(丙方)마을
545년(신라 진흥왕대) 김해 김씨 김맥종(金麥宗)의 집안이 병마산(兵馬山)아래에 정착하면서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설촌 당시는 “동쪽울(東籬)”이라 하였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에는 70여 호의 대촌을 이루었으나 대화재로 인해 마을이 전소(全燒) 됨에 따라 병마산 남쪽 끝(현 丙方)에 마을을 새로 설촌하였다. 당시 거장 김아달(金阿達)이 주축이 되어 마을 이름을 잔수(潺水)라 하다가 “찬수”라고도 하였다. 여울의 아래쪽에 있다하여 아래잔수(下潺)이라 하였으며 섬진강물 흐르는 소리가 잔잔히 흐른다고 하여 “잔수”라 하였다. 1392년(조선 태조)경에 역점(驛坫)을 신설했다가 1861년(조선 철종 12년)에 역점과 관반(官般)등이 폐쇄됨에 따라 병마산을 병방산(丙方山)으로 찬수(潺水)를 병방리(丙方里)로 개칭하였으며 행정구역상 계사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
신월리
신촌(新村)마을
조선시대(연대미상) 청송 심씨(靑松沈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당시에는 “잔수진"이었으며 역(南原. 獒樹관할)과 원이 있었고 구읍기(舊邑基. 후삼국시대로 추정)로 현재까지 관동머리, 관서당터, 구장터, 옥밤이 등의 옛 이름이 있으며, 구한말에는 계사면 소재지로 봉서리, 원방리, 신월리, 계산리, 유곡리 일원을 관할한 중심지였다. 그러나 대홍수(연대미상) 이후 유랑민이 정착하여 마을을 새로 세웠다 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신월리 신촌“이라 개칭하여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
월암(月岩)마을
1483년경 김해 김씨 한 분이 마을 근처를 지나다 날이 저물어 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니 뒷산이 감돌아 아담하고 따뜻하여 집터를 잡은 후 각 성씨들이 모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아랫마을 월계(月溪)는 약 250여 년 전에 삭녕(朔寧) 최씨가 터를 잡고 살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이 동서로 감돌아 마을 모양이 동근 달과 같이 생겼고 마을 복판 상단과 하단 복판에 큰 바위(岩)가 있어 “월암(月岩)”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계사면이었는데 구례면(읍)으로 편입되었다.
계산리
독자(讀字)마을
1679년(조선 숙종 5년)경에 남평 문씨가 뒷골층 안골에 정착하여 개척하고 20년 후인 1699년경에 침대나무골로 영월 엄씨 두 세대가 입주하였으며 그 다음 밀양 박씨 등 10세대가 터를 닦았으며 그 후 김해 허씨가 들어와 지금 주성(主姓)을 이루고 있다. 1779년경 마을 사람들이 모여 글을 많이 읽은 동네라 하여 독서동(讀書洞)이라 하였는데 1799년경에 다시 독자동(讀字洞)으로 개칭하였다. 당초에는 계사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례면(읍)으로 편입되었다.
유곡(楡谷)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차 씨(車氏), 최 씨(崔氏), 서 씨(徐氏), 조 씨(趙氏)가 터를 닦아 농경지를 만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 땅을 개간할 때 유협전(楡莢錢- 중국 漢代에 鑄造한 銀錢)이 나왔다 하여 유(楡 자를 따서 유곡(楡谷)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옛날에 이 골짜기에 느릅나무가 번성해서 느릅실(누룩실. 楡谷)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제일 윗마을부터 상유(上楡), 중유(中楡), 하유(下楡)의 3개 마을이 있다.
논곡리
논곡(論谷)마을
임진왜란 당시 피난지를 찾아 정착한 것이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는데 제일 먼저 풍천 임씨(豊川任氏)가 정착하고 다음 김 씨(金氏), 류 씨(柳氏)의 3 성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3성씨가 마을을 형성하면서 마을 이름을 짓자고 논의가 있었는데 여러가지로 이야기하다가 결국 우리들이 우선 논의했으니 논(論)자를 먼저 쓰고 이름의 결실을 보자는 의미에서 실(實)자를 써서 논실(論實)이라 칭하다가 일제 때 논곡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은 어느 호사자(好事者)의 억해(抑解)일 것 같다. 당초에는 계사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본황리(本黃里)와 곡성군 고달면 탑선리 일부 지역을 병합(倂合)하여 논곡리(論谷里)라 하여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
본황(本黃)마을
임진왜란 당시 김해 김씨가 피난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차츰 형성되었다. 약 1,300여 년 전에 세워진 화엄사의 말사 황룡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3층 석탑(보물 제509호)이 있어 탑선리(塔仙里)라 하다가 황룡사는 화엄사의 말사로서 화엄사가 근본이기 때문에 본(本)자와 황룡사가 있었다 하여 황(黃)자를 따서 본황(本黃)이라 이름했다. 당초 이 마을은 구례군 계사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적구역 통폐합 때 곡성군 고달면 탑선리 일부를 병합하여 논곡리 본황(本黃) 마을로 고쳐서 구례면(읍)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