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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추천 관광지,
구례의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시간여행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이었던 2021년도 어느덧 저물어갑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옛 선조들의 고난 극복의 경험을 다시 되새겨 보게 되는데요. 저물어가는 2021년을 마무리하며 구례의 역사를 찾아서 시간여행을 떠나보시면 어떨까요?

구례를 대표하는 인물인 매천 황현선생, 석주관에서 의병항쟁을 벌였던 왕득인,왕의성 부자, 주변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처절하게 왜군에 맞서 싸웠던 석주관 의병과 화엄사 승병 그리고 일본군에 맞서 끝까지 항쟁을 벌이다 순절한 고광순 의병장 등의 숭고한 의절을 생각하며 시간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매천사
※ 글·사진 : 구례군 문화관광해설사 임세웅 촬영 장소 : 매천사

1. 매천사

매천사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에 위치한 매천사는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인 매천 황현 선생을 모신 사당입니다.
매천사
1855년(철종 6)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난 매천 선생은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 등의 후손으로 인조반정 이후 정계에 유력한 인사를 배출하지 못하여 시골의 유생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11세가 되는 해에 서당에서 천사 왕석보 선생을 스승으로 모기고 시와 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후 20대가 되어서부터 많은 시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매천사
광양 출신인 매천 선생이 구례로 온 이유는 바로 스승인 왕석보 선생 때문입니다. 왕석보 선생은 황현 선생을 비롯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한제국 시기 계몽운동가 해학 이기 등을 배출한 호남을 대표하는 대학자입니다.
매천사
1888년 34세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당시 과거장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그는 낙향하여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울에서는 강위를 스승으로 하여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유하였습니다.
매천사
선생은 1886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16여 년을 지내며 많은 시와 매천야록 등을 저술하는 데 몰두하였습니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그가 저술한 대표적인 역사서로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기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서술한 근대사 관련 중요 자료입니다. 매천야록은 당시의 역사전반을 서술한 것이고 오하기문은 자신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입니다.
매천사 매천사 매천사 매천사 매천사
  • 1902년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로 다시 이주한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직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관리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이들을 추모하였습니다.
  •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향리의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의연금을 모집하여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 1910년 8월 29일 우리 민족은 일제에게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고 그 통분을 이기지 못한 황현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을 느끼고 절명시 4수를 남긴 후 자결하였습니다.
  •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 선생의 절명시 4수 중 3수
  •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

2. 왕씨삼세충효정려

왕씨삼세충효정려
광의면 지천리에 위치한 왕씨삼세충효정려는 충신 왕득인, 충신 왕의성 부자와 효자 왕지익 등 개성 왕씨 3인의 정려입니다.
왕씨삼세충효정려
1786년(정조 10) 조정으로부터 왕지익에게 효자 정려가 내려졌고, 이듬해인 1787년 정려각이 건립되었습니다.
왕씨삼세충효정려
왕득인과 왕의성은 정유재란 때 석주관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웠던 석주관 칠의사 중 2인으로, 1812년(순조 12) 충신 정려가 내려졌습니다. 1813년 개성왕씨 후손들이 '왕씨삼세 충효정려'를 새로 건립하였고, 184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릅니다.
왕씨삼세충효정려
왕득인과 왕의성은 정유재란 때 석주관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웠던 석주관 칠의사 중 2인으로, 1812년(순조 12) 충신 정려가 내려졌습니다. 1813년 개성왕씨 후손들이 '왕씨삼세 충효정려'를 새로 건립하였고, 184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릅니다.
왕씨삼세충효정려
왕득인과 왕의성은 정유재란 때 석주관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웠던 석주관 칠의사 중 2인으로, 1812년(순조 12) 충신 정려가 내려졌습니다. 1813년 개성왕씨 후손들이 '왕씨삼세 충효정려'를 새로 건립하였고, 184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릅니다.
왕씨삼세충효정려 왕씨삼세충효정려 왕씨삼세충효정려 왕씨삼세충효정려 왕씨삼세충효정려
  • 충신 왕득인(1556∼1597)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떠난 며칠 후 왜군에 의해 함락된 구례에서 의병을 모아 석주관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 등 큰 타격을 입혔으나 왜군과의 교전 중에 전사하였습니다.
  • 몇 달 후 그의 아들 왕의성이 지역의 젊은 선비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과 화엄사에 격문을 보내 승병 153명과 군량미 103석을 지원받아 다시 석주관에서 왜군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 조국에 피를 바쳤습니다.
  • 왕득인의 아들인 왕의성은 높은 곳에 포진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고 인조 14년 병자호란때 나라를 구하고자 재차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571-1

3. 호남 최고의 요새, 구례 석주관성

호남 최고의 요새, 구례 석주관성
호남 최고의 요새인 석주관성은 경남 하동과 전남 구례 경계 인근에 지리산을 끼고 세워진 고려시대의 성곽입니다.
호남 최고의 요새, 구례 석주관성
섬진강을 사이에 둔 요새지에 해당되며 경상남도 하동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방어시설로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석주관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군사전략상 매우 중시되었던 곳으로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랑치와 함께 호령간 4대 관문의 하나로 고려 때부터 진을 설치하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던 요새입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남원에 진을 배풀고 11월에 이곳에 성을 쌓았고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요새지로 팔랑치와 이곳에 축성한 것이며 구례 현감 이원춘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1593년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하동을 지나 남원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의 패배이후 사천을 지나 두치(하동)을 거쳐 구례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장군은 석주관을 지나셨습니다. 이순신장군이 구례를 지나 곡성으로 이동하신후 8월 6일 구례현감 이원춘은 남원으로 퇴각했고 8월 7일 구례는 왜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되고 전주성도 함락되어 전라도 전역은 왜군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왜군에 의해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그리고 살육 행위가 자행되었습니다. 전에 없던 최악의 전쟁 피해를 입은 지역이 바로 전라도 지역이었습니다. 석주관 전투는 9월 하순 이후와 11월 사이 2차례에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9월 하순에는 왕득인이, 11월 초에는 왕득인의 아들인 왕의성,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등 구례의병 3,500명과 153명의 화엄사 승병이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일본군의 기지화한 상황에서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지원도 끊긴 절망적인 상태에서 전개된 처절한 항쟁이었습니다. 추위가 한창이던 때에 이루어진 악전고투한 매우 충격적인 의병항쟁이었습니다.
호남 최고의 요새, 구례 석주관성
섬진강을 사이에 둔 요새지에 해당되며 경상남도 하동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방어시설로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석주관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군사전략상 매우 중시되었던 곳으로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랑치와 함께 호령간 4대 관문의 하나로 고려 때부터 진을 설치하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던 요새입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남원에 진을 배풀고 11월에 이곳에 성을 쌓았고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요새지로 팔랑치와 이곳에 축성한 것이며 구례 현감 이원춘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1593년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하동을 지나 남원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의 패배이후 사천을 지나 두치(하동)을 거쳐 구례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장군은 석주관을 지나셨습니다. 이순신장군이 구례를 지나 곡성으로 이동하신후 8월 6일 구례현감 이원춘은 남원으로 퇴각했고 8월 7일 구례는 왜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되고 전주성도 함락되어 전라도 전역은 왜군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왜군에 의해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그리고 살육 행위가 자행되었습니다. 전에 없던 최악의 전쟁 피해를 입은 지역이 바로 전라도 지역이었습니다. 석주관 전투는 9월 하순 이후와 11월 사이 2차례에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9월 하순에는 왕득인이, 11월 초에는 왕득인의 아들인 왕의성,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등 구례의병 3,500명과 153명의 화엄사 승병이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일본군의 기지화한 상황에서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지원도 끊긴 절망적인 상태에서 전개된 처절한 항쟁이었습니다. 추위가 한창이던 때에 이루어진 악전고투한 매우 충격적인 의병항쟁이었습니다.
호남 최고의 요새, 구례 석주관성
전라도 53개 읍 가운데 읍세가 가장 약한 고을, 적세가 특히 강했던 고을, 주위의 읍에서 부역행위로 보신책을 삼는 식자들이 적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구례 석주관 의병의 행동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훗날, 석주관 전투에 참전한 의병 지도자층의 후예들이 의병활동을 계승하는데 석주관 전투에서 생존한 왕의성은 병자호란 때 다시 의병활동에 참여하였고 영조 때는 그의 후손과 5의사 후예들이 의병 활동을 벌입니다. 정유전망의병추념비(丁酉戰亡義兵追念碑) 후면에 새겨진 글 중 "혈류성천(血流成川) 위벽위적(爲碧爲赤)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도다"의 "혈천"을 순 우리말로 풀어 낸 것이 "피내골(피아골)"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호남 최고의 요새, 구례 석주관성
전라도 53개 읍 가운데 읍세가 가장 약한 고을, 적세가 특히 강했던 고을, 주위의 읍에서 부역행위로 보신책을 삼는 식자들이 적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구례 석주관 의병의 행동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훗날, 석주관 전투에 참전한 의병 지도자층의 후예들이 의병활동을 계승하는데 석주관 전투에서 생존한 왕의성은 병자호란 때 다시 의병활동에 참여하였고 영조 때는 그의 후손과 5의사 후예들이 의병 활동을 벌입니다. 정유전망의병추념비(丁酉戰亡義兵追念碑) 후면에 새겨진 글 중 "혈류성천(血流成川) 위벽위적(爲碧爲赤)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도다"의 "혈천"을 순 우리말로 풀어 낸 것이 "피내골(피아골)"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호남 최고의 요새, 구례 석주관성
이곳에서 싸운 의병장들을 석주관칠의사라 하며, 1804년(순조 4) 성터 옆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호남 최고의 요새, 구례 석주관성
이곳에서 싸운 의병장들을 석주관칠의사라 하며, 1804년(순조 4) 성터 옆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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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525-1

4.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왕씨삼세충효정려
1907년 고광순 의병장은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 거점을 마련하고 장기항전 태세를 구축했습니다.
왕씨삼세충효정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지만 워낙 전력 차이가 커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습니다. 고광순 의병장이 순국한 지 며칠이 지나서 우국시인이자 당대의 기록자인 매천 황현은 연곡사를 찾아갔고 고광순 의병장 무덤의 봉분을 돌보면서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추모시 한편을 남겼습니다.
왕씨삼세충효정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1958년 선생이 순국한 구례 피아골 연곡사의 소요대사탑 근처 동백나무 숲 아래에는 선생을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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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4
  • #구례 #구례여행 #구례역사기행 #구례시간여행 #매천사 #석주관 #의병장고광순순절비 #왕씨삼세충효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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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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