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통합메뉴

구례군청 통합메뉴란? 사용자들이 구례군청 홈페이지에서 사이트별로
목적에 따라 정보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메뉴를 모아 놓은 서비스입니다.

구례군청

분야별정보

구례여행

보건의료원

통합메뉴 닫기
본문

9월 걷기 좋은 길
남도이순신길 수군재건로 구례 구간

지난 7월 27일 영화 한산:용의 출현이 개봉했고 두 달 만에 관객수가 700만을 돌파했습니다.
영화 명량 이후 다시 이순신 장군 관련 영화가 개봉하면서 남도이순신길 백의종군로와 수군재건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해마다 진도와 해남에서 열렸던 명량대첩축제가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열립니다.
구례군 토지면의 석주관성부터 구례읍의 조선수군출정공원까지 이어진 남도이순신길 수군재건로를 걸었다.

-코스 : 석주관 ~ 운조루 고택 ~ 용호정 ~ 조선수군출정공원

석주관
※ 글·사진 : 구례군 문화관광해설사 임세웅

석주관 ~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은 1597년 음력 4월 26일 구례에 들어오셨다. 구례와 순천에서 군량미와 무기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권율 장군에서 수집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백의종군 군무를 수행하였다. 1597년 음력 7월 16일 원균이 이끌던 조선의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되었고 결국 선조 임금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고 궤멸된 조선의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8월 3일 석주관을 통해 구례에 입성하였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1.석주관 석주관은 고려 말 왜구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와 내륙에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랑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을 통하는 4대 관문의 하나로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정유재란 초기에 가장 심한 참화를 입은 구례 지방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난 곳 이기도 하다. 칠의사 사당 앞쪽에 위패가 8개, 옆에 2개 놓여 있다. 앞의 위패 8개는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구례 현감 이원춘과 석주관 전투에서 전사한 왕득인 등 7의사 위패이고 옆에 있는 두 개의 위패는 구례 일반 의병과 화엄사 의승병의 신위이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은 고려 말 왜구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와 내륙에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랑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을 통하는 4대 관문의 하나로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정유재란 초기에 가장 심한 참화를 입은 구례 지방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난 곳 이기도 하다. 칠의사 사당 앞쪽에 위패가 8개, 옆에 2개 놓여 있다. 앞의 위패 8개는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구례 현감 이원춘과 석주관 전투에서 전사한 왕득인 등 7의사 위패이고 옆에 있는 두 개의 위패는 구례 일반 의병과 화엄사 의승병의 신위이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은 고려 말 왜구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와 내륙에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랑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을 통하는 4대 관문의 하나로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정유재란 초기에 가장 심한 참화를 입은 구례 지방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난 곳 이기도 하다. 칠의사 사당 앞쪽에 위패가 8개, 옆에 2개 놓여 있다. 앞의 위패 8개는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구례 현감 이원춘과 석주관 전투에서 전사한 왕득인 등 7의사 위패이고 옆에 있는 두 개의 위패는 구례 일반 의병과 화엄사 의승병의 신위이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은 고려 말 왜구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와 내륙에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랑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을 통하는 4대 관문의 하나로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정유재란 초기에 가장 심한 참화를 입은 구례 지방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난 곳 이기도 하다. 칠의사 사당 앞쪽에 위패가 8개, 옆에 2개 놓여 있다. 앞의 위패 8개는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구례 현감 이원춘과 석주관 전투에서 전사한 왕득인 등 7의사 위패이고 옆에 있는 두 개의 위패는 구례 일반 의병과 화엄사 의승병의 신위이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1597년 8월 7일 왜군은 구례를 지나 남원으로 진군하면서 구레 지역을 초토화하였다. 16일에는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전주를 무혈입성하여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왜군의 잔악상은 극치에 달하였다.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고 재물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남원성 함락과 더불어 남원, 구례, 곡성 일대는 전쟁 피해가 극심하였고 백성들은 산 깊은 곳으로 숨거나 보따리를 싸고 강원도 등으로 피난 가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심 넘치는 선비들이라도 의병을 일으킬 엄두를 못 냈고 의병 활동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1597년 8월 7일 왜군은 구례를 지나 남원으로 진군하면서 구레 지역을 초토화하였다. 16일에는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전주를 무혈입성하여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왜군의 잔악상은 극치에 달하였다.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고 재물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남원성 함락과 더불어 남원, 구례, 곡성 일대는 전쟁 피해가 극심하였고 백성들은 산 깊은 곳으로 숨거나 보따리를 싸고 강원도 등으로 피난 가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심 넘치는 선비들이라도 의병을 일으킬 엄두를 못 냈고 의병 활동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1597년 8월 7일 왜군은 구례를 지나 남원으로 진군하면서 구레 지역을 초토화하였다. 16일에는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전주를 무혈입성하여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왜군의 잔악상은 극치에 달하였다.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고 재물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남원성 함락과 더불어 남원, 구례, 곡성 일대는 전쟁 피해가 극심하였고 백성들은 산 깊은 곳으로 숨거나 보따리를 싸고 강원도 등으로 피난 가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심 넘치는 선비들이라도 의병을 일으킬 엄두를 못 냈고 의병 활동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1596년에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 김덕령 옥사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9월 하순에 구례 석주관 의병 항전이 일어났다. 구례 출신 선비 왕득인이 50여 명의 향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왕득인은 죽기를 각오하고 매복에 의한 기습전이나 산곡 간의 바윗돌을 굴려 내리는 석탄 공법으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조총을 가진 왜적의 대순을 당해낼 수가 없었으며 의병들은 석주관에서 모두 순절하였고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였다. 11월 초에 구례에서 2차 의병이 다시 일어났으며 구례의 20대 젊은 선비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이었다. 이들 의병은 9월 하순에 순절한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이 주축이 된 왕의성 군과 구례현의 각 면에서 모여든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오종, 고정철 등 이른바 5의사군이 합세한 의병 연합체였다. 이후 구례 의병은 화엄사로부터 의승병 153명과 곡식 103석을 지원받아 군세를 보강하였다. 11월 하순에 큰 전투가 벌어졌고 구례의병은 일시 대승을 거두는 듯했지만 계속 밀려오는 왜군의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의사군과 의승군은 모두 전사하고 산정에 있던 왕의성 부대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의병과 의승들의 피가 골짜기를 물들였고 피 냄새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곳을 피아골이라고 하였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1596년에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 김덕령 옥사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9월 하순에 구례 석주관 의병 항전이 일어났다. 구례 출신 선비 왕득인이 50여 명의 향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왕득인은 죽기를 각오하고 매복에 의한 기습전이나 산곡 간의 바윗돌을 굴려 내리는 석탄 공법으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조총을 가진 왜적의 대순을 당해낼 수가 없었으며 의병들은 석주관에서 모두 순절하였고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였다. 11월 초에 구례에서 2차 의병이 다시 일어났으며 구례의 20대 젊은 선비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이었다. 이들 의병은 9월 하순에 순절한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이 주축이 된 왕의성 군과 구례현의 각 면에서 모여든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오종, 고정철 등 이른바 5의사군이 합세한 의병 연합체였다. 이후 구례 의병은 화엄사로부터 의승병 153명과 곡식 103석을 지원받아 군세를 보강하였다. 11월 하순에 큰 전투가 벌어졌고 구례의병은 일시 대승을 거두는 듯했지만 계속 밀려오는 왜군의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의사군과 의승군은 모두 전사하고 산정에 있던 왕의성 부대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의병과 의승들의 피가 골짜기를 물들였고 피 냄새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곳을 피아골이라고 하였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1596년에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 김덕령 옥사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9월 하순에 구례 석주관 의병 항전이 일어났다. 구례 출신 선비 왕득인이 50여 명의 향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왕득인은 죽기를 각오하고 매복에 의한 기습전이나 산곡 간의 바윗돌을 굴려 내리는 석탄 공법으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조총을 가진 왜적의 대순을 당해낼 수가 없었으며 의병들은 석주관에서 모두 순절하였고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였다. 11월 초에 구례에서 2차 의병이 다시 일어났으며 구례의 20대 젊은 선비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이었다. 이들 의병은 9월 하순에 순절한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이 주축이 된 왕의성 군과 구례현의 각 면에서 모여든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오종, 고정철 등 이른바 5의사군이 합세한 의병 연합체였다. 이후 구례 의병은 화엄사로부터 의승병 153명과 곡식 103석을 지원받아 군세를 보강하였다. 11월 하순에 큰 전투가 벌어졌고 구례의병은 일시 대승을 거두는 듯했지만 계속 밀려오는 왜군의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의사군과 의승군은 모두 전사하고 산정에 있던 왕의성 부대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의병과 의승들의 피가 골짜기를 물들였고 피 냄새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곳을 피아골이라고 하였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의병항쟁이 알려진 것은 정조 22년(1798)이며 이때 화엄사 승당을 중수 하면서 두 건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승병 격문과 '정유란 일기'가 그것이다. 이후 순조 4년 (1804)에 7의사들에게 공훈이 내려졌으며, 고종 5년(1868)에 칠의단이 건립되었고 1901년에 칠의각이 지어졌다. 석주관을 지나 운조루 고택까지는 지리산둘레길 오미-송정 구간과 겹치는 구간으로 파도리 갈림길까지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파도리 갈림길부터 운조루 고택까지는 토지면 들녘을 바라보며 걷는 임도길로 이루어져 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의병항쟁이 알려진 것은 정조 22년(1798)이며 이때 화엄사 승당을 중수 하면서 두 건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승병 격문과 '정유란 일기'가 그것이다. 이후 순조 4년 (1804)에 7의사들에게 공훈이 내려졌으며, 고종 5년(1868)에 칠의단이 건립되었고 1901년에 칠의각이 지어졌다. 석주관을 지나 운조루 고택까지는 지리산둘레길 오미-송정 구간과 겹치는 구간으로 파도리 갈림길까지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파도리 갈림길부터 운조루 고택까지는 토지면 들녘을 바라보며 걷는 임도길로 이루어져 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2. 운조루 고택 운조루 고택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세운 것으로 99칸(현존 73칸)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 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 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 고택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금환락지, 오보교취, 혹은 오봉귀소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집에 있는 나무로 된 쌀독의 마개에 타인능해라는 글귀를 써두었고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운조루 고택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세운 것으로 99칸(현존 73칸)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 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 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 고택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금환락지, 오보교취, 혹은 오봉귀소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집에 있는 나무로 된 쌀독의 마개에 타인능해라는 글귀를 써두었고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운조루 고택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세운 것으로 99칸(현존 73칸)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 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 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 고택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금환락지, 오보교취, 혹은 오봉귀소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집에 있는 나무로 된 쌀독의 마개에 타인능해라는 글귀를 써두었고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운조루 고택부터 섬진강 변 용호정까지는 노랗게 물들어가는 토지면 들녘과 섬진강 둑길로 이루어져 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운조루 고택부터 섬진강 변 용호정까지는 노랗게 물들어가는 토지면 들녘과 섬진강 둑길로 이루어져 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운조루 고택부터 섬진강 변 용호정까지는 노랗게 물들어가는 토지면 들녘과 섬진강 둑길로 이루어져 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운조루 고택부터 섬진강 변 용호정까지는 노랗게 물들어가는 토지면 들녘과 섬진강 둑길로 이루어져 있다.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석주관  운조루 고택

용호정 ~ 조선수군출정공원

용호정
3. 용호정 구례군 토지면 용두마을은 지리산의 맥이 노고단 형제봉을 따라 내려오다가 섬진강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그곳이 용의 머리 부분이라고 하여 용두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리산의 줄기가 강물을 만나는 곳에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
용호정
구례군 토지면 용두마을은 지리산의 맥이 노고단 형제봉을 따라 내려오다가 섬진강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그곳이 용의 머리 부분이라고 하여 용두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리산의 줄기가 강물을 만나는 곳에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
용호정
구례군 토지면 용두마을은 지리산의 맥이 노고단 형제봉을 따라 내려오다가 섬진강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그곳이 용의 머리 부분이라고 하여 용두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리산의 줄기가 강물을 만나는 곳에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
용호정
1916년 건립된 용호정은 호수에서 용이 올랐다는 전설을 간직한 채 솔바람과 풍광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합니다. 망국의 울분을 달래기 위해 구례 지역 유지들이 헐리게 된 고각루를 사들여 이곳에 옮겨 건립한 것이다.
매천 황현 선생의 스승이신 천사 왕석보 선생의 후학인 권봉수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셨습니다.
바위 언덕에 터를 닦아 이 한 정자 일으켰으니
위태롭다 백 척(百尺) 위에서 물가에 허리 구부렸어
섬진강에서 돌아온 돛대 가물가물 보이는데
오산(鰲山)에서 쇠 북소리 역력히 들려오네
우제단(雩祭壇) 빈터에 가시덤불 푸르고
사도촌(沙圖村) 입구엔 연기빛 푸르누나
유명한 이 지역 내 토지(土地) 아닌 것을 깨달았어
서쪽 바람에 홀로 서서 눈물만 흘렸다오
1920년경 이 시를 지은 지촌 권봉수 선생은 왕수환, 왕재소, 박해룡, 권석호 등과 함께 구례 사립학교인 호양학교를 설립한 분으로 호양학교가 1920년 폐교되는 등 일제의 감시와 핍박 그리고 망국의 한과 민족애를 한껏 담았다.
용호정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섬진강 풍경은 너무 아름답다. 용호정 앞에는 섬진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길은 남도이순신길 수군재건로의 일부 구간이다.
용호정
1916년 건립된 용호정은 호수에서 용이 올랐다는 전설을 간직한 채 솔바람과 풍광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합니다. 망국의 울분을 달래기 위해 구례 지역 유지들이 헐리게 된 고각루를 사들여 이곳에 옮겨 건립한 것이다.
매천 황현 선생의 스승이신 천사 왕석보 선생의 후학인 권봉수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셨습니다.
바위 언덕에 터를 닦아 이 한 정자 일으켰으니
위태롭다 백 척(百尺) 위에서 물가에 허리 구부렸어
섬진강에서 돌아온 돛대 가물가물 보이는데
오산(鰲山)에서 쇠 북소리 역력히 들려오네
우제단(雩祭壇) 빈터에 가시덤불 푸르고
사도촌(沙圖村) 입구엔 연기빛 푸르누나
유명한 이 지역 내 토지(土地) 아닌 것을 깨달았어
서쪽 바람에 홀로 서서 눈물만 흘렸다오
1920년경 이 시를 지은 지촌 권봉수 선생은 왕수환, 왕재소, 박해룡, 권석호 등과 함께 구례 사립학교인 호양학교를 설립한 분으로 호양학교가 1920년 폐교되는 등 일제의 감시와 핍박 그리고 망국의 한과 민족애를 한껏 담았다.
용호정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섬진강 풍경은 너무 아름답다. 용호정 앞에는 섬진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길은 남도이순신길 수군재건로의 일부 구간이다.
용호정
용호정을 지나 섬진강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멀리 구례읍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 섬진강의 물을 마시는 자라의 형상인 오산, 차일봉부터 왕시루봉까지 이어진 지리산 능선을 벗 삼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용호정
용호정을 지나 섬진강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멀리 구례읍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 섬진강의 물을 마시는 자라의 형상인 오산, 차일봉부터 왕시루봉까지 이어진 지리산 능선을 벗 삼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용호정
용호정을 지나 섬진강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멀리 구례읍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 섬진강의 물을 마시는 자라의 형상인 오산, 차일봉부터 왕시루봉까지 이어진 지리산 능선을 벗 삼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조선수군출정공원
4.조선수군출정공원 1597년 4월 26일 손인필 등 구례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금부도사와 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백의종군 관련 군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순천에 머물면서 정사준 등 여러 군관을 만나 전라도 연해안의 정보를 수집하고 향후 전략을 구상했다.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라는 권율 장군의 명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정사준을 비롯한 유능한 군관을 대동하고 순천을 떠나 구례로 돌아와 다시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등 백의종군 군무를 수행하며 원수부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14일 동안 구례에 머물며 군자감 첨정 손인필, 체찰사 이원익 등과 승리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손인필은 군자감에 소속되어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았던 인물로 장군에게 병참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권율 장군의 원수부로 가기 위해 5월 26일 구례를 떠나 석주관을 지나 악양, 하동, 옥종 등을 거쳐 원수부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도 정보 수집 등의 군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5월 26일 종일 큰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면서 길에 올라 막 떠나려는데, 사량 만호 변익성이 조사받을 일로 이종호에게 붙잡혀서 체찰사 앞에 왔다. 잠깐 서로 대면하고는 석주관의 관문에 가니,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말을 쉬게 하고 간신히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악양의 이정란의 집에 당도했는데, 문을 닫고 거절하였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이때 손인필의 장남 손응남은 장군의 명을 받아 연해안의 정보를 수집하는 등 이순신 곁을 지켰으며 칠천량 해전의 패배 소식을 접하고 장군의 명을 받고 구례로 돌아왔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고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되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직접 주변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될 때까지 동분서주했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이순신 장군은 군관 9명, 병졸 6명과 함께 구례에 재입성했다.
조선수군출정공원
1597년 4월 26일 손인필 등 구례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금부도사와 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백의종군 관련 군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순천에 머물면서 정사준 등 여러 군관을 만나 전라도 연해안의 정보를 수집하고 향후 전략을 구상했다.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라는 권율 장군의 명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정사준을 비롯한 유능한 군관을 대동하고 순천을 떠나 구례로 돌아와 다시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등 백의종군 군무를 수행하며 원수부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14일 동안 구례에 머물며 군자감 첨정 손인필, 체찰사 이원익 등과 승리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손인필은 군자감에 소속되어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았던 인물로 장군에게 병참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권율 장군의 원수부로 가기 위해 5월 26일 구례를 떠나 석주관을 지나 악양, 하동, 옥종 등을 거쳐 원수부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도 정보 수집 등의 군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5월 26일 종일 큰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면서 길에 올라 막 떠나려는데, 사량 만호 변익성이 조사받을 일로 이종호에게 붙잡혀서 체찰사 앞에 왔다. 잠깐 서로 대면하고는 석주관의 관문에 가니,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말을 쉬게 하고 간신히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악양의 이정란의 집에 당도했는데, 문을 닫고 거절하였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이때 손인필의 장남 손응남은 장군의 명을 받아 연해안의 정보를 수집하는 등 이순신 곁을 지켰으며 칠천량 해전의 패배 소식을 접하고 장군의 명을 받고 구례로 돌아왔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고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되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직접 주변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될 때까지 동분서주했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이순신 장군은 군관 9명, 병졸 6명과 함께 구례에 재입성했다.
조선수군출정공원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 하여 곡식까지 가져왔다. 손응남은 올감을 바쳤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의 백성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과 무기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구례의 백성들은 석주관성을 지나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식량을 바쳤고 나무에 걸린 덜 익은 감을 따서 바쳤다.
구례에 재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구례 백성으로부터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곡성, 순천, 보성 등 전라도의 해안 마을을 거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조선수군출정공원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 하여 곡식까지 가져왔다. 손응남은 올감을 바쳤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의 백성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과 무기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구례의 백성들은 석주관성을 지나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식량을 바쳤고 나무에 걸린 덜 익은 감을 따서 바쳤다.
구례에 재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구례 백성으로부터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곡성, 순천, 보성 등 전라도의 해안 마을을 거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조선수군출정공원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 하여 곡식까지 가져왔다. 손응남은 올감을 바쳤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의 백성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과 무기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구례의 백성들은 석주관성을 지나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식량을 바쳤고 나무에 걸린 덜 익은 감을 따서 바쳤다.
구례에 재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구례 백성으로부터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곡성, 순천, 보성 등 전라도의 해안 마을을 거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조선수군출정공원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 하여 곡식까지 가져왔다. 손응남은 올감을 바쳤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의 백성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과 무기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구례의 백성들은 석주관성을 지나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식량을 바쳤고 나무에 걸린 덜 익은 감을 따서 바쳤다.
구례에 재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구례 백성으로부터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곡성, 순천, 보성 등 전라도의 해안 마을을 거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조선수군출정공원
1597년 8월 4일 구례를 출발한 이후 44일 만인 9월 16일 명량 앞바다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끄셨다. 구례 통제영에서의 출정 결의가 명량대첩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44일간의 조선 수군 재건의 시작은 바로 구례였고 명량대첩 승리의 초석은 바로 구례에서의 출정 결의였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준 인물이 바로 손인필이다.
조선수군출정공원
1597년 8월 4일 구례를 출발한 이후 44일 만인 9월 16일 명량 앞바다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끄셨다. 구례 통제영에서의 출정 결의가 명량대첩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44일간의 조선 수군 재건의 시작은 바로 구례였고 명량대첩 승리의 초석은 바로 구례에서의 출정 결의였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준 인물이 바로 손인필이다.
용호정 용호정 용호정 용호정 용호정 용호정 용호정 용호정 조선수군출정공원 조선수군출정공원 조선수군출정공원 조선수군출정공원 조선수군출정공원 조선수군출정공원 조선수군출정공원 조선수군출정공원
  • 손인필은 그의 장남과 함께 노량해전에 참전했으며 그 해전에서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군자감 첨정관이었던 손인필은 이후 군자감 정관으로 추증되었다.
  • 가장 힘든 시기에 머물렀던 구례에서 힘을 얻은 이순신 장군은 구국의 길에 나섰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주었던 구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고 구례 통제영의 출정 결의가 명량대첩 승리의 초석이 되었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 #구례 #구례걷기좋은길 #명량대첩축제 #석주관 #남도이순신길 #수군재건로

콘텐츠관리

  • 담당부서 문화관광실
  • 담당자 서준석
  • 연락처 061-780-2390
  • 최종수정일 2023-04-13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