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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 위치도

용방면 마을유래

연혁

구례군 용천(龍川) 또는 용강면(龍江面)의 사신, 두동, 당동, 봉덕, 죽림, 사우, 지동, 본신, 용정 신룡, 탄동 등 11개 마을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원부 중방방의 감동, 송정, 신기, 도암, 가동, 죽동, 분토동, 강정의 8 마을과 외산면(外山面)의 우와 마을 일부를 편입하여 용강과 중방의 두 면의 이름을 결합하여 구례군 용방면이라 개칭하여 사림, 신도, 신지, 용강, 용정, 죽정 중방 7개 리를 관할한다.

위치

구례군청에서 남원시로 가는 국도 서편 6km지점인 용방명 용정리에 면사무소를 가지고 서쪽으로는 곡성군과 고달면과 남쪽으로는 구례읍 산성리 동쪽으로는 광의면 연파리 북쪽으로는 산동면 이평리를 접하고 있으며, 광활하고 기름진 전답의 옥토와 인심좋고 살기좋은 고장을 자랑한다.

용방면 마을

사림리

사림(四林)마을

고려시대 흥익(興翼)이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한 후 낙향하여 현지에 거소를 정하고 살았다. 그는 청주 한씨 시조 태위공 한난의 20세손이면 안양공 파조 종손의 7세손이다. 흥익이 서기 1572년 임신생으로 당대 조봉대부 행참봉을 지냈는데 마을 앞에 흐르는 서시천을 막아 농사를 지었다. 그 보를 ‘한보(韓洑)’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도 한보가 농업 용수로 이용된다. 이 한보 앞 들녘을 ‘한보거리’ 또는 ‘한보들’로 부르게 되었다. 죽림(竹林)은 ‘대숫골(대숲골)’이라 불렀다. 천마봉이 주산이다. 천마봉을 안장봉, 산성봉, 대안이라고 부른다. 그 곳에 ‘호랑이바우’, ‘체게바우’, ‘장사바우’가 있고 마을에 옛적에는 바가지 샘으로 4곳이나 있었으나 지금은 3곳이 남아 있다. 마을이 행주형(行舟型)이기 때문에 마을 안에 샘을 파지 않았다. 마을에서 50m밖에 있는 샘만을 이용했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지하수를 개발하여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재실(齋室)로는 성모재(誠慕齋)가 마을 북쪽에 있다. 청주 한씨 흥익을 모시는 재실이다. 1946년 2월에 목조 삼칸을 건립하였다. 최초 회관을 목조5칸(木造五間) 초가로 마을 중앙 672번지에 세웠으나 1950년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1957년 주민의 힘으로 같은 장소에 목조와가 삼칸을 지었고, 1972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 앞 646-1번지에 시멘트 불럭 와가 삼칸을 지어 면모를 다듬었는데 이 또한 낡고 협소하여 2000년에 정부의 지원금과 마을 주민의 힘, 그리고 출향 인사들의 도움으로 같은 해 9월에 현대식 회관을 건립했다. 이처럼 이 마을은 40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사우(四友)마을

1736년경에 옥천 조세연이 정착하였고 제주 고씨, 경주 최싸가 들어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사우 마을은 1912년 조선총독부 행정구역명칭일람과 1914년 조선면리동일람에 四隅로 기록되었다. 언제 어떻게 四友로 한자가 바뀌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보다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四友로 바꾸었을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문방사우를 사랑했다. 여기에 눈을 두고 보면 한자가 바뀐 까닭을 이해할 것이다. 처음에는 지금의 ‘원마을’과 ‘살구정’을 함께 ‘넘실이’이라 불렀고 조진원이 1819년(순조 19년 기묘년)에 장원급제를 하여 방목동(榜木洞 :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고 나무에 방을 달아 높은 마을)이라 불렀으며 마을이 번창해 4개 뜸이 형성되자 四隅라 불렀다. 그러나 四隅는 ‘넘실이’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의 용천면(龍川面) 6개 마을에 우곡리(隅谷里)가 있다. 이 우곡리가 ‘넘실이’의 이두식 이름이고 마을 4뜸이 형성되자 四隅로 바뀌었고 다시 四友로 미화(美化)한 것이다.

용강리

하신(下新)마을

한신은 1912년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 사신(四新)이라 기록되었는데 하신은 ‘아래새터’라 부른다. 전씨가 살아 전촌(全村)이라 부르다가 고흥유씨가 들어왔다. 거기를 ‘새터’라 불렀다. 같은 면에 2갱의 ‘새터’라 불렀다. 같은 면에 2개의 ‘새터’가 있어서 구별해 부르려고 ‘아래새터’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下新’으로 표기했다.

두동(斗洞)마을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앞 도로변에 10여 호가 살았다고 하며, 1,500년경에 세종대왕 제 4 왕자 임영대군의 증손 운양도정공 낙남지(落南地)를 국풍(國風-나라에서 유명한 풍수)에게 마을 뒤 준령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사패지(賜牌地) 75정보 가운데에서 집터를 잡게 했는데 그가 용강리 665번지(현재 종각)에 집터를 잡았다. 그래서 현재까지 18대나 대대로 살고 있다. 배출 인물은 정유재란 때 석주관에서 왜적을 무찌른 이정익(李廷翼)이 있다. 그가 석주관 칠의사 가운데 한 분이다. 당초에는 마을 자리에 못(池)이 있었다하여 두지동(斗池洞)이라 칭하다가 두동(斗洞)으로 개칭하였으나 1914년 해정구역 개편 때 용강으로 개칭하였다. 그런데 1914년까지 용강은 면이름 이었다. 그리고 1789년 호구총수에 용천면(龍川面)이라 하였다.

봉덕(鳳德)마을

지곡(地谷) 또는 당동(堂洞)과 봉학동(鳳鶴洞)의 두마을이 있었다. 1930년 경에 두 마을의 머리 글자를 따서 당봉이라 칭하다가 1940년경에 다시 봉덕으로 개칭하였다. 지곡 또는 당동은 ‘땅골’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땅’이란 뜻으로 ‘地’, 소리로는 ‘堂’으로 표기한 이두식 문자이다. ‘골’은 ‘洞’으로 표기 했다. 그런데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는 용강면 11개 마을 가운데 당동과 봉덕리가 보이고 1789년 “호구총수”에 두지동(豆池洞)이 보인다. 이로 보아 1800년 말에 생긴 마을 같다.

신지리

신지(新智)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진주(晉州) 강팔촌(姜八村)이 처음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당초에는 지동촌(智洞村)이라고 하였으나 마을이 번창하면서 신촌(新村)으로 개칭하여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지라고 개칭하였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 용강면 11개 마을 가운데 본신과 지동이 있다. 지동과, 본신마을을 결합해서 1914년에 신지리로 개칭 하였다.

선월(船月)마을

1820년경 안동 권씨 31세손 권덕일이 처음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갱변가라 하며 강변촌(江邊村)이라 부르다가 1930년 여수 삼일면 강을용이 입주하여 이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마을 지형이 ‘배(船)’와 같다고 하여 1938년도에 선월이라 개칭하였다. 그런데 1789년의 “호구총수” 중방방에 강정리(江亭里)가 있고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 중방면의 8개 마을 가운데 강정리가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생각하면 ‘강변촌’, ‘갱본가’란 강정 마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용정리

상용(上龍)마을

당초에 탄동(炭洞)과 신룡동(新龍洞) 2개 마을로 형성되었는데 탄동은 영조 6년(경술 1730년)에 강주하와 그의 아내인 평강 채씨와 함께 정착하였고 신룡동은 순조 23년(1822)에 천안김씨와 고령박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온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소 위에 있다하여 ‘상룡’이라 개칭하였으며 솣골은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 때 본 마을로 모두 이거하였다.

하용(下龍)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진주강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온다. 현 면사무소 저자거리는 연대미상이나 하용 원마을에서 면사무소가 현 위치로 옮겨진 후 형성되었다고 한다. 당초에는 마을 뒷산 골짜기에 용이 살았다고 하는 소(沼)가 있었는데 이 용소가 있다하여 ‘신용동’이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송의 아래 위치에 있다하여 하용이라 개칭하였다. 현대의 면사무소를 일명 저자거리라 부르는데 조선 전기의 문신 윤효손이 감동(甘洞, 현 감천) 마을에 살았는데 매일 이십여 리 떨어진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 부모님을 모시는 효성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이를 알고 면사무소 부근에 저자(시장)를 지어주어 지금도 저자거리라 부르고 있다.

중방리

감천(甘泉)마을

지금부터 약 500년(1486) 전경에 남원윤씨(南原尹氏)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남원부 중방면에 속하였으나 광무원년(1897)에 구례군 중방면 감동(甘洞)으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중방리 감천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송정(松亭)마을

지금부터 약 500년 전(1486년)경에 남평문씨가 처음 정착하여 취락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남원부 중방방의 소재지로 최고 번성기에는 300여 호까지 되었다 한다. 광무원년(1897)에 구례군 중방면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방면 중방리가 되었다. 마을이 형성된 후 마을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많아 송정이라 하였다. 경주 최씨, 삭영 최씨, 김해 김씨 등이 먼저 살았다는 설도 있다.

신도리

도암(道岩)마을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있었다. 그래서 ‘독바우’라 칭하였다. 그런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 때 도암으로 개칭하였다. ‘독바우’를 ‘독’과 ‘바우’로 나누어 ‘독’을 ‘도’, ‘바우’를 ‘암’으로 한자화 했다. 이런 표기가 이두식 표기다.

가동(柯洞)마을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하동정씨(河東鄭氏)가 정착한 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남원부 중방방에 속하였는데 광무원년(1897)에 구례군 중방면이 되었다. 냇가에 가재가 많다하여 ‘가재골’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방면 신도리 ‘가동’이라 칭하였다. ‘가재’를 ‘가(柯)’로 ‘골’을 ‘동(洞)’으로 뜻 옮김하여 한자로 표기했다.

신기(新基)마을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의령남씨가 처음 정착하여 농토를 일구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남원부 중방방에 속하였으나 광무원년(1897)에 구례군 중방면이 되었다.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하여 ‘새터’라고 불렀는데 면에 새터가 2개(웃새터, 아랫새터) 있어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방면 신도리 신기로 한자표기 한 것이다. ‘새’는 ‘신(新)’ ‘터’는 ‘기(基)’로 뜻 옮김한 것이다.

죽정리

죽정(竹亭)마을

지금부터 약 1286년경에 흥덕(興德) 장호성(張浩成)이 마을 뒷산에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기 위해 처음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죽동 마을은 우리말 이름이 ‘대절골’, ‘대죽골’, ‘원죽(元竹)’이다. 절이 있어서 대절골이라 하였고, 대절골을 한자로 죽사동(竹寺洞)이라 쓴다. 마을 뒷산 암자 부근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어서‘대죽골’이라 부르고 맨 처음에 마을이 있었다는 뜻에서 원죽 마을이라 불렀다.

분토(粉土)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여양 진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온다. 당초에는 두골(斗谷) 또는 분두골(紛斗谷)로 칭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강정을 합하여 분토라고 개칭하였다.

콘텐츠관리

  • 담당부서 용방면
  • 담당자 배윤아
  • 연락처 061-780-8502
  • 최종수정일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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