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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역사 여행 구례 사립 호양학교와 매천사
2024년 12월 구례 추천 관광지
구례를 대표하는 인물인 매천 황현 선생입니다.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 많은 저서를 남기고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자결로서 항거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날카로운 문학정신과 굽힐 줄 모르는 역사의식은 우연히 드러난 것이 아닙니다.
황희 정승, 황진 장군 등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지만 거기에 더해 훌륭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 글·사진 : 구례군 문화관광해설사 임세웅
촬영 장소 : 구례 역사 여행 구례 사립 호양학교와 매천사
구례 역사 여행 구례 사립 호양학교와 매천사
매천 황현 선생을 가르친 스승은 바로 구례지역의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었던 호양학교를 설립한 왕수환, 왕재소, 권석호, 권봉수 등의 스승이기도 한 천사 왕석보 선생입니다.
매천 황현 선생을 가르친 스승은 바로 구례지역의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었던 호양학교를 설립한 왕수환, 왕재소, 권석호, 권봉수 등의 스승이기도 한 천사 왕석보 선생입니다.
창평의 춘강 고정주 선생과 쌍벽을 이룬 천사 왕석보 선생은 지리산 자락인 구례에 칩거하며 어린 매천 황현을 가르쳤고 홍암 나철 등 호남의 애국지사를 길러냈습니다.
천사 왕석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매천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에 죽음으로 항거했으며 홍남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에 강제로 체결되자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시도했던 인물입니다. 그 속에 매천이 끼게 된 것은 여간 다행히 아닐 수 없습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온 나라의 민심은 들끓었고 구례 지역에서 왕석보 선생의 후학들의 주도로 민족주의 교육을 목표로 1908년 8월 신문화 교육기관인 구례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온 나라의 민심은 들끓었고 구례 지역에서 왕석보 선생의 후학들의 주도로 민족주의 교육을 목표로 1908년 8월 신문화 교육기관인 구례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천사 왕석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매천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에 죽음으로 항거했으며 홍남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에 강제로 체결되자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시도했던 인물입니다. 그 속에 매천이 끼게 된 것은 여간 다행히 아닐 수 없습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온 나라의 민심은 들끓었고 구례 지역에서 왕석보 선생의 후학들의 주도로 민족주의 교육을 목표로 1908년 8월 신문화 교육기관인 구례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온 나라의 민심은 들끓었고 구례 지역에서 왕석보 선생의 후학들의 주도로 민족주의 교육을 목표로 1908년 8월 신문화 교육기관인 구례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천사 왕석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매천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에 죽음으로 항거했으며 홍남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에 강제로 체결되자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시도했던 인물입니다. 그 속에 매천이 끼게 된 것은 여간 다행히 아닐 수 없습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온 나라의 민심은 들끓었고 구례 지역에서 왕석보 선생의 후학들의 주도로 민족주의 교육을 목표로 1908년 8월 신문화 교육기관인 구례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온 나라의 민심은 들끓었고 구례 지역에서 왕석보 선생의 후학들의 주도로 민족주의 교육을 목표로 1908년 8월 신문화 교육기관인 구례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壺山午麓芝川里 호산오록지천리 - 방호산의 정남쪽 기슭 지천리에
陽地寅坊刱學宮 양지인방창학궁 - 양지바른 동쪽 터에 학교를 세웠네
太極鐘聲蠻酋劣 태극종성만추열 - 태극 종소리에 오랑캐 우두머리 놀라고
開來功烈魯叟風 개래공열노수풍 - 장래를 여는 뛰어난 공적은 공자님 가르침이네
爲先正脈流兹裏 위선정맥유자리 - 선영을 위한 정맥이 이 속에 흐르니
救國真源載此中 구국진원재차중 - 나라를 구하는 참된 근원도 이 가운데 있네
陽地寅坊刱學宮 양지인방창학궁 - 양지바른 동쪽 터에 학교를 세웠네
太極鐘聲蠻酋劣 태극종성만추열 - 태극 종소리에 오랑캐 우두머리 놀라고
開來功烈魯叟風 개래공열노수풍 - 장래를 여는 뛰어난 공적은 공자님 가르침이네
爲先正脈流兹裏 위선정맥유자리 - 선영을 위한 정맥이 이 속에 흐르니
救國真源載此中 구국진원재차중 - 나라를 구하는 참된 근원도 이 가운데 있네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재정 등을 지원해 좋은 일을 도모하자'라는 취지의 '모연소'를 작성하여 지역의 유림과 재력가로부터 부족한 학교 운영기금을 마련했습니다.
구례 사람들은 이 호양학교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의 기초를 세웠고 신간회, 금란회 등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호양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폐교되었고 2006년에 복원되어 현재는 학생들의 예절 교육 및 정신 교육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호양학교에서 사용되었던 동종이 공개되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교육장실에 보관 중인 높이 50cm, 지름 25cm 크기의 이 동종은 중앙에 태극무늬가 양각되어 있어 태극 동종으로 불립니다.
구례 사람들은 이 호양학교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의 기초를 세웠고 신간회, 금란회 등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호양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폐교되었고 2006년에 복원되어 현재는 학생들의 예절 교육 및 정신 교육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호양학교에서 사용되었던 동종이 공개되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교육장실에 보관 중인 높이 50cm, 지름 25cm 크기의 이 동종은 중앙에 태극무늬가 양각되어 있어 태극 동종으로 불립니다.
이 태극 동종은 구례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에 위치한 매천사는 붓끝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긴 매천 황현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곳으로 1962년 건립되었으며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에 위치한 매천사는 붓끝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긴 매천 황현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곳으로 1962년 건립되었으며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태극 동종은 구례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에 위치한 매천사는 붓끝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긴 매천 황현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곳으로 1962년 건립되었으며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에 위치한 매천사는 붓끝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긴 매천 황현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곳으로 1962년 건립되었으며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태극 동종은 구례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에 위치한 매천사는 붓끝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긴 매천 황현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곳으로 1962년 건립되었으며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에 위치한 매천사는 붓끝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긴 매천 황현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곳으로 1962년 건립되었으며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건물은 대월헌이고, 우측 건물은 유물전시관입니다. 내부에는 매천 황현 선생의 일대기와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하기문은 동학농민운동을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로 매천은 충격을 받고 '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경과가 어떻게 됐는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 매천야록은 현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잘 기록해야 훗날에 그것이 거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쓴 책으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1호'로 선정되었습니다. 일제가 어떻게 조선을 침략했고 매국노와 친일파가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붓으로 현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건물은 대월헌이고, 우측 건물은 유물전시관입니다. 내부에는 매천 황현 선생의 일대기와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하기문은 동학농민운동을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로 매천은 충격을 받고 '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경과가 어떻게 됐는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 매천야록은 현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잘 기록해야 훗날에 그것이 거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쓴 책으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1호'로 선정되었습니다. 일제가 어떻게 조선을 침략했고 매국노와 친일파가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붓으로 현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건물은 대월헌이고, 우측 건물은 유물전시관입니다. 내부에는 매천 황현 선생의 일대기와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하기문은 동학농민운동을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로 매천은 충격을 받고 '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경과가 어떻게 됐는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 매천야록은 현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잘 기록해야 훗날에 그것이 거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쓴 책으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1호'로 선정되었습니다. 일제가 어떻게 조선을 침략했고 매국노와 친일파가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붓으로 현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건물은 대월헌이고, 우측 건물은 유물전시관입니다. 내부에는 매천 황현 선생의 일대기와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하기문은 동학농민운동을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로 매천은 충격을 받고 '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경과가 어떻게 됐는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 매천야록은 현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잘 기록해야 훗날에 그것이 거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쓴 책으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1호'로 선정되었습니다. 일제가 어떻게 조선을 침략했고 매국노와 친일파가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붓으로 현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대월헌은 매천 황현 선생이 순국 자결한 장소로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아쉽게도 기와집으로 복원되어 조금 아쉽습니다. 대월헌의 대는 기다릴 대待, 월은 달 월月로, 월곡마을에서 달로 상징하는 조국 혹은 임금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내삼문인 성인문은 '인을 이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매천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인 매천사가 잘생긴 소나무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습니다.
내삼문인 성인문은 '인을 이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매천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인 매천사가 잘생긴 소나무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습니다.
내삼문인 성인문은 '인을 이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매천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인 매천사가 잘생긴 소나무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습니다.
사당에는 매천 선생의 위패와 초상화 그리고 사진이 모셔져 있습니다. 초상화는 조선 말기의 화가인 채용신이 그린 것이고 사진은 1909년 찍은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축제정보
- 매천 선생은 을사늑약 후 자결 순국한 민영환, 홍만식, 조병세, 이미 순국한 이건창, 의병장 최익현 등 5명을 애도하는 시인 오애시를 남겼고 결국 선생도 1910년 그들처럼 자결 순국했습니다.
- 일본과의 외교 분쟁이 잦은 요즘, 호양학교와 매천 황현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정신과 의병 정신을 다시한번 되새겨봅니다.
- #구례 #호양학교 #매천사 #대극동종 #천사왕석보 #매천황현 #구례역사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