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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의 피해 개요

구례읍은 구례 지역의 문화, 교통, 교육의 중심지로 남쪽으로 섬진강 너머의 문척면, 동쪽으로 마산면, 북쪽으로 용방면과 닿았고 서쪽으로 곡성군 고달면, 서남쪽으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순천시 황전면과 접해있다. 구례읍의 진산인 봉성산과 구례읍을 끼고 흐르는 서시천, 섬진강 양정 강변은 대표적인 여순10·19 학살지이다.

구례읍은 제12연대가 주둔하였던 지역이어서 여순10·19 당시에도 많은 피해를 겪었다. 1948년 11월 19일 05시경 김**가 이끄는 봉기군의 습격(구례경찰서, 구례군청, 봉성산 등)으로 교전이 벌어졌고, 봉기군의 습격으로 피해를 입은 군경은 교전 직후, 구례경찰서에 유치되어 있던 민간인들을 경찰서 옆 공터 등지에서 사살하고 봉성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이른바 ‘봉성산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07년 6월~7월에 거쳐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는데 14개체의 유해와 탄두 등 총 46점의 유품이 발굴되었다.

군경이 좌익의 근거지로 판단한 계산리의 경우는 좌익과 무관한 주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집단으로 사살하여 특히 피해가 심했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49년 1월 20일 중대병력 규모의 군인들이 계산리 유곡마을에 들어와 계곡국민학교에 주민들을 소집시켰다. 토벌군은 남로당 가입 여부를 추궁하며, 손을 든 사람들은 학교 근처 섬진강변 대밭에 구덩이를 파게 했고, 손을 들지 않은 22명은 파놓은 구덩이 주변에 세워놓고 사살하였다. 그 이후에도 계산리 유곡마을 주민 일부가 섬진강변 대나무밭에서 사살되었는데 대부분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토벌군과 경찰은 1948년 11월부터 1949년 초에 걸친 토벌작전과정에서 계산리뿐만 아니라 봉남리, 봉동리, 봉서리, 산성리, 원방리 등 구례읍 전역에 걸쳐 주민들을 구례경찰서 등지로 연행한 뒤, 그중 다수를 구례읍 봉성산이나 섬진강 양정지구(문척교 주변), 서시천변(서시교 아래) 등지에서 1948년 11월부터 지속적으로 사살하고 매장하였다. 이처럼 구례읍 지역에는 다수의 학살지가 존재하고 있다.

구례읍 여순사건 역사유적지

봉성산 (설치위치 : 봉성산 공원 입구)

구례는 ‘여순10·19사건’의 최장기 피해지역이었다. 김지회, 홍순석 등의 중위들이 이끌었던 제14연대 봉기군은 1948년 10월 23일 구례에 처음 들어와 3일 간 구례읍을 점령하였다가 10월 26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국군 제3연대와 제12연대가 차례로 구례에 들어와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이후 봉기군은 ‘개전한달 기념식’을 치르기 위해 1948년 11월 19일 새벽 진압군 본부(중앙초등학교)를 기습하여 교전을 벌였다. 기습을 당한 군경은 19일 아침 봉기군 협조 혐의 등으로 구례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80여 명의 민간인을 경찰서 옆 공터, 봉성산 등지에서 사살하였다. 시신은 봉성산 공동묘지에 구덩이를 세 곳 파서 집단 매장하였다. 출입이 통제되어 사건 몇 달 후에야 유가족들이 수습에 나섰으나 시신들이 서로 뒤엉켜 신원확인이 불가능했다. 담당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매장된 시신은 총 72구였다고 한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봉성산 유해발굴 작업을 실시했고, 14개체의 유해와 탄두 등 46점의 유품을 발굴하였다.

서시천변(서시교 아래)

1948년 10월 19일 여순10·19사건이 발발했고 10월 22일 밤 봉기군들이 백운산과 순천 삽재를 넘어 구례 간전면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섬진강을 건너 토지면 문수골을 통해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구례지역 여순10·19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구례읍 일대에 주둔했던 12연대에 의해 1948년 11월부터 1949년 4월까지 서시천 다리 아래에서의 민간인 학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한청단원이었던 한**와, 이**는 ‘진실・화해위원회’ 참고인 조사에서 “본인은 당시 사람들을 묶고 서시천변에 구덩이를 길게 파 시신을 묻는 일을 했으며, 당시의 가해 세력은 다리 위에 기관총을 설치해 거의 매일 석양 무렵 30명 정도를 모아놓고 쏘아 죽였다”고 진술했다.

1948년 11월 19일 새벽 구례읍을 습격했다 패퇴한 봉기군들을 추격하던 12연대 진압군이 화엄사 아래 마산면 황전리에 들어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마을 앞 논으로 집결시킨 후 주민 16명을 연행하여 서시천 다리 밑 모래밭에서 집단 학살하였다.

구례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구례군 각 면에서 구례경찰서로 연행되어 구금, 취조받던 민간인들이 경찰에 의해 수시로 서시천 다리 아래로 끌려가 사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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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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